52번째 로그

Beauteous Curse

세상이 두 번 멸망한다면
나는 약자의 편에 서겠지요.
주께서 그리하였듯
스스로를 파괴하려 들겠지요.

당신은 한 번조차 멸망하지 않았으니
어떤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백 번도 넘게 보내왔던 밤을, 증오로, 사랑으로─
그것도 아니라면 욕망으로 채우겠습니까?

//

세상이 두 번 멸망한다면
나는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겠지요.
주께서 그리하였듯
삿된 외면을 감내해야 하겠지요.

유일한 나의 이해자는 당신뿐이거늘
어떤 길을 가야 하겠습니까?
백 번도 넘게 견딘 밤을, 증오로, 사랑으로─
그것도 아니라면 욕망으로 채워야 하겠습니까?

51번째 로그

TOVI: THE UNHOLY PREACH

……걸음걸음마다 부적(不適)이 잇따른다. 한 걸음에 후회가, 한 걸음에 슬픔이, 한 걸음에 의존이, 갈증이, 허기가. 밀물처럼 밀려와 기도하곤 썰물처럼 사라지는 사람들, 회개와 동시에 존재하는 그릇된 바람. 어리고 늙은 마을의 진부성은 신앙으로 더욱 낙후된다. 레토 블랜차드는 신존(神存)은 모를지언정 실존(實存)에는 탁월하여, 부존하는 불결성을 직면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영원히 그림자 속에서 녹아들 것만 같던 흡혈귀를, 가장 순수한 더러움을 보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사실 그는 기꺼이 의무이기 이전에 그리되길 바랐다. 그는 무감한 생을 뒤흔드는 어떠한 운명이 나타나기를 사력으로 바라왔고, 지금은 그에 대한 감사를 직접 벼린 칼로 자신의 피부를 갈라 보혈(寶⾎)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증명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굶주린 자에게 주었으며, 그녀는 굶주린 배를 움키고 먹었다. 하나뿐인 가족은 더 이상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바랬으니 이제 그는 그녀에게 유일한 온기의 보존자였고 유일한 생명의 수호자였다. 거부할 수 없을 한없는 다정함의 현신이었다.

"이리 와, 착하지."
"...개 다루듯 굴지 마."
"웬걸, 내가 언제 그랬다고."

결코 태어나지 않았어야만 하는 존재. 그러나 단 하나의, 다정한 정상성을 촉발하는 둘도 없는 존재. 레토 블랜차드는 미사의 마지막 시간에나 고해실에서의 고역을 겪노라면 그와 데비를 두 사람에게 빗댔다. 그는 로랑 르클레어였으며, 그녀는 테레즈 라캥임에 틀림이 없다. 언젠가 그녀에게 성(性)이 부여된다면 가히 영원 어둠(Black)이 어울리리라. 데비에게 의존은 어쩔 수 없는 수단이었고, 레토에게 그녀의 의존은 인생에 기꺼운 단 하나의 불이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50번째 로그

LENA: LAB IN A GARDEN GREENHOUSE
_ By Leto Blanchard & Davina Green

「바람이 차다. 들어가는 게 좋겠군.」
영원한 불문(不問)의 모르모트, 다비나 그린에게.

그저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야. 수많은 사람에게 남을 불후의 명작, 그러나 나는 세상을 마주하지 않고 하나뿐인 문을 닫아버렸다. 행복은 과거의 공유물(共有物), 우리는 우려anxiety의 결과물. 지하실의 문을 열지 않는 까닭은 단지 지하에는 빛이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입에 담기도 끔찍한 죄악의 결과, 바뀌지 않을 진리의 논제. 그러나 나는 원죄(原罪) 없이는 맥없이 급사하는 육신이다. 침전하는 독은 순수한 열망을 유발한다. 방문은 언제나 당신이 잠든 환영의 끝에. 발자국은 지워질 잎의 위에. 우리는 생명의 감옥에서.

「…응. 얘도 같이 들어가고 싶대.」
나의 하나뿐인 연구원, 레토 블렌차드에게.

레토,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어. 참을 수 없는 심리적 저항Caligula effect. 수많은 사람이 열광할 불후의 존재성, 그러나 나는 닫힌 문에 의문 갖지 않는다. 행복은 현재의 침전물(沈澱物), 우리는 우려anxiety의 결과물. 당신이 문을 열지 않는 까닭은 단지 지하에는 식물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행동과 말의 근거지, 원인도 결과도 추론할 수 없는 불가지론(不可知論). 환영은 언제나 거울에 머무르고, 나는 파
편에 손을 뻗기도 전 밀려오는 졸음에 순종한다. 어른거리는, 까만 빛……침전하는 독은 순수한 열망을 꺼뜨린다. 망각은 언제나 환영의 시작에, 발자국은 지워질 잎의 위에. 우리는 생명의 감옥에서.

49번째 로그

TOVI: ULTIMATE PARTNERS
_ By Leto Blanchard & Devi black

「이미 모든 수수께끼는 풀렸어.」
수소문, 수소문! 발발(勃勃)의 해결자는 ‘그’ 탐정뿐!

한낱 사건에 독창성이라는 칭호를 허락하지 않을 강인한 속성은 오로지 데비 블랙만이 지닌 전무후무한 능력이다. 그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이여! 감정 없는 소아(⼩兒)의 명석함은 실존을 맞이한다. 실존은 해답에 이르고, 해답은 진상에 이른다. 진상을 파악한 천금의 입은 진실을 이야기한다. 저 찢어지게 가난한 브레드 피즈의 펍으로부터 성 제임스 거리까지, 전역이 차례로 숨죽이도록…… 나는 이마쥬image의 추적자, 어떤 탐정의 역사보다도 훨씬 내밀하고 광대하다. 장외의 존재를 수용할 만큼.

「글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저 미치광이는 재소자(在所者)로 만들어야만 했어!

막대한 시뮬라크르simulacre! 타오르는 불을 걷잡을 자 없고 얼어버린 마음을 녹일 자도 없다. 매년 벌이던 피의 축제는 휴식기를 맞았다. 그 수수께끼 같은 존재여! 한낱 사건에 독창성이라는 칭호를 허락하지 않는 강인한 속성도 그저 소아(⼩兒)의 것. 실존은 욕구에 이르고, 욕구는 혼재로 뻗친다. 천금의 입이 이야기하지 못할 진실을 만들어내도록, 저 브레드 피즈의 펍으로부터 성 제임스 거리까지…… 나는 어둠의 추적자, 어떤 범죄의 역사보다도 훨씬 내밀하고 광대하다. 즐거움과 미묘함 사이로.

48번째 로그

"폐하."
"말하거라."
"저는 망가졌습니다."
"내가 고쳐주마."
"어찌 고칩니까."
"너를 망가뜨리는 것들 모두 내가 없애주마."
"폐하는 그리 못 하십니다."
"하늘 아래 내가 못하는 게 어디 있겠느냐. 다 말해보거라."

이 남자는 천자이자 천하를 호령하는 군주이다. 그는 진정 그의 말을 실현시킬 힘이 있다. 비연은 다시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귀애하는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바로 당신이라면 당신 어떡할 것인가. 나를 위해서 죽을 사람이 아니지 않나. 내게 안배된 것 중에 그런 이름 따위 없는 것을 자신은 안다고. 비연은 목울대 흐느끼는 소리를 낼 뻔 했으나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그를 참아냈다. 그가 자신을 위해 죽지 않는 것이 비참한 것이 아니다. 여전히 제게 주어진 것 중 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 없음이 참담한 것이지.
허탈해 질린 낯을 바라보며 사현은 그 나름 절박하여 안타깝게 비연을 본다. "연아." 그가 말한다.

"나는 네가 필요하다."

숨이 막혔다.
망가질 대로 망가졌는데도 내가 필요하다면 나의 이름은 그냥 물건의 것과 다르지 않나. 그 말을 들은 순간에 비연은 손을 뻗어 옆에 있는 화병을 순식간에 집어던졌다. 쨍! 숨죽여 지켜보던 궁인들이 소리를 지른다. 마마! 사현은 헛숨을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처소를 아예 나가지는 않았다. "연아." 다시 호명. 비연은 짐승처럼 씩씩거리며 제 침의를 풀어헤치고 옆에 있던 함을 던지고 탁상을 치워 내리치고 닥치는 대로 몸을 휘둘렀다. "몸이 상할까 저어된다, 연아……." 마마,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소리에도 멈추지 않고.
그러다 비연이 동작을 멈췄다. 일순의 춤, 가운데 정적인 것처럼 사현도 그 광경을 보며 호흡을 멈춘다. 비연은 침상 머리맡에 숨겨놓았던 단검을 빼들었다. 호신을 위해서는 흔한 일이니 사현은 놀라지 않았다. 궁인들이 놀란 낯 그대로 멈추면 비연은 발치에 비쳐 들어오는 태양빛의 몰락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진정한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 말했다.
 
"폐하께서 하셨던 말을 늘 생각했습니다."

무엇이든 영원까지는 걸리지 않겠지…….

"영원은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사현은 영원, 이라는 말을 듣고서 "연아," 거의 본능처럼 그를 불렀다. 비연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날붙이 위로 핏빛 붉은 햇살이 길게 비추어 떨어졌다.

"이제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겠습니다."
"……."
"영원은 없습니다, 폐하."
"……."
"하여 폐하께서 소첩을 붙잡아 두는 데에도 영원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했던 말이 그대로 비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일몰을 똑바로 마주 하는 것은 고비연이요 사사현이야말로 햇빛을 등지고 서 있는데 비연의 검은 눈에는 눈부신 황혼 한 점마저 비치지 않았다. 사현은 기필코 손을 뻗으려 했다. 손을 뻗으려 했는데.
다음 순간 비연이 스스로의 목에 단검을 찔러 넣는다.
다시없을 것처럼 찢어지는 비명이 울리고 궁인들이 뛰쳐들었다. 마마, 마마! 정신을 차려보옵소서! 의관을 불러! 울컥울컥 솟는 핏물이 황혼보다 더 붉다. 태양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인 것처럼 이제는 거짓 같은 밤이 오고 있다. 스스로의 눈앞에서 목숨을 끊은 여자는 이제 둘이 되었나. 그들 모두 제가 사랑했기 때문에 떠나려 한 것인가. 사현은 홀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거기 서 있다가 겨우 갈라지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태의, …태의를 불러라." 궁녀들이 아연하고 파리한 낯짝으로 침상에 늘어진 비연의 몸을 눕히고 상처를 틀어막는 동안 사현은 눈 감은 비연의 얼굴을 응시했다가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놔……."

그 말은 꼭 살려줘……, 처럼 들렸다.
해가 지면 밤이 오지만 그것이 연속적으로 항시 오는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흔들리는 별, 달 없는 그믐, 그래서 밝지 않은 밤이 온다.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는 밤이.

47번째 로그

"고빈 마마, 고공 대감께서 오셨습니다."

고공 대감. 침상에 걸터앉아 있던 비연의 얼굴이 굳는다. 돌아가는 상황이야 예측하기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궁 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귀하고 얌전한 척 아양 떠는 주제에 저잣거리 누구보다도 말을 돌리는 데 소질이 있는 치들이니, 황제께서 시침을 들라는 명에 제가 난리를 치며 그러지 아니하겠다 한 것 소문 난 것이야 빤할 테다. 아비는 정년이 다 되어 퇴궐하고도 권력 놓을 생각이 없으니 저를 빈으로 입궁시키며 사람을 심어두었을 것이고, 궁내 풍문이 퍼졌다면 그가 마땅히 발 빠르게 달려와야 옳다. 비연은 피로한 낯으로 손을 들어 궁녀들을 물렀다. 그나마 고빈과 고공의 사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나인 하나만이 그의 곁에 남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마마."
"괜찮지 아니하면 어쩔 것이야."

비연은 건조하게 말하면서도 실은 그렇게 답하고 싶었다. 제 생에 단 한 번도 괜찮았던 적이 없으니 도리어 괜찮은 것이라고. 나를 위하거나 혹은 위하는 척할 필요가 없다고.
문이 열린다. 문 바깥은 오후다. 햇빛을 등지고, 인자하다 못해 간신배 같은 낯짝을 한 노인이 가증스럽게도 손을 모으고 "마마를 뵙습니다." 인사하는 것을 비연은 뚫어져라 시선만 줄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인은 옆에서 조심스레 춘원의 자리를 내고 다기를 준비했다. 차 우리는 향이 나기 시작하면 비연은 일어나 스스로 문을 닫는다. 춘원이 문을 닫지 않고 궁 안에 침범했기 때문이다. 그것 불청객의 행태로는 몹시 어울리는 것이다.

46번째 로그

바람이 불고, 도포가 한 번 크게 펄럭인다. 방금까지도 얼핏 노랗게 종이 바랜 빛이나 물들었던 하늘은 금세 주홍의 화마에 덮이고 있다. 사현은 턱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그제야 한 단씩 층계를 내려 밟았다. 군화의 밑창에 여지없이 차가운 돌바닥이 닿지만 고매한 황제의 버선 안 맨발에 그것의 온도가 닿을 리는 없다. 노을이 지고, 대동 없이 홀몸으로 처소를 나와 후원으로 향한 사현은 어느 날 아침에 본 그대로인 봉오리 틔우지 못한 꽃들을 둘러본다. 그것 역시 바람에 가녀리게 흔들리고 있는데 어떤 꽃송이도 어 째 비연을 닮았다는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그야 저것들은 피어 있지 않되 외로이 있지도 않고 무더기로 함께 봉오리로 있지 않은가. 만개할 때도 저것들은 서로와 함께일 터인데…….

45번째 로그

"그것이……"
"……." 사현은 말을 채근하는 대신 한 단을 내려갔다. 거리가 좁혀지면 제왕, 폭군이 두른 공기의 무게는 그것만으로 실로 크게 내려앉는다. 궁녀가 숨을 삼켰다.
"……옵니다."
"크게 말하라."
"고, 고뿔에 드신 것은 거짓이 아니옵니다. 다만 폐, 폐하께서 하명하신 것 들으시고서는……, 마마께서 못의 냉수를 퍼 담아 가져오라 명하시고…… 스스로 머리 위로 그를 끼얹으셨나이다. 그도 모자라 젖은 바닥이며 비 온 뒤 진창 된 곳을 스스로 구르시니 그 아무도 마마를 말리지 못하여……."
"……."
"송구하옵니다, 폐하."
"그럴 것 없다."

자애로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제게 벌이 떨어지지 않는 것만으로 궁녀는 안도한다. 저녁 때 다가오고 있으매 하늘은 점차 저물고, 볕이 노랗고 붉게 스며드는 것을 그대로 받아내며 사현은 한 단 밑으로는 더 내려가지 못하는 채로 발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돌이 깔린 처소의 포도된 바닥은 여지없이 차겠다. 아직 계절이 추운 탓에 그렇다. 자신에게 그렇다면 비연에게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테다. 그대 이번에는 무엇이 그리 거슬려 또 다시 제 몸 연약한 줄을 모르고 진창에 굴러 기어이 병환 들게 만들었나. '이번에도' 나 때문인가. 사현이 고개를 발끝 향해 숙이고 있노라면 앞에 섰던 궁녀는 그의 깎아지른 듯 냉막한 표정을 흘끔거렸다가 다시 고개를 숙인다. "이만 물러가도록." 궁녀의 움직임을 눈치 챈 사사현은 마지못해 명을 내리고, 그러면 꾸벅 숙이는 예 올린 인사와 함께 그는 비로소 혼자 다시 처소에 남겨지게 된다.

44번째 로그

Romantic Comedy

세기의 낭만을 모방하는 배우는
가히 오만한 사랑을 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세습된 인내의 부족과
우월을 탐하는 갑의 횡포.
다듬어지지 않은 교만을 미사여구처럼 두르고,
거만한 태도로 선사하는 시혜적 애정.
스포트라이트 아래 조명된
미샤 데이의 찬란한 인생!
그러나, 로건 버트런드 앞에서
미샤 데이는 늘 을의 위치로 전락한다.
친히 베풀어주는 사랑에
감히 탄복하지 않는 무감한 낯빛.
타성처럼 쏟아내는 울화에도
고지식한 태도를 유지하는 부동의 존재.
미샤 데이에게 난생처음 처절한 실패를 안겨준
유일무이한 남자.
어리고 앳된 사랑의 병열은
일생을 오만과 자긍심으로 살아온 미샤 데이가
오기 어린 열등을,
확신할 수 없는 결말을,
불가항력의 인력을 깨닫게 한다.
그들의 사랑은
고전 문학 속 세기말의 연인으로도,
삼류 영화의 클리셰로도,
탐미주의적 예술로도 형용할 수 없다.
그야말로, 로맨틱 코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