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번째 로그

Romantic Comedy

세기의 낭만을 모방하는 배우는
가히 오만한 사랑을 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세습된 인내의 부족과
우월을 탐하는 갑의 횡포.
다듬어지지 않은 교만을 미사여구처럼 두르고,
거만한 태도로 선사하는 시혜적 애정.
스포트라이트 아래 조명된
미샤 데이의 찬란한 인생!
그러나, 로건 버트런드 앞에서
미샤 데이는 늘 을의 위치로 전락한다.
친히 베풀어주는 사랑에
감히 탄복하지 않는 무감한 낯빛.
타성처럼 쏟아내는 울화에도
고지식한 태도를 유지하는 부동의 존재.
미샤 데이에게 난생처음 처절한 실패를 안겨준
유일무이한 남자.
어리고 앳된 사랑의 병열은
일생을 오만과 자긍심으로 살아온 미샤 데이가
오기 어린 열등을,
확신할 수 없는 결말을,
불가항력의 인력을 깨닫게 한다.
그들의 사랑은
고전 문학 속 세기말의 연인으로도,
삼류 영화의 클리셰로도,
탐미주의적 예술로도 형용할 수 없다.
그야말로, 로맨틱 코미디.

43번째 로그

"탈 겁니까." 로건은 익스트림 롤러코스터 앞에서 물었다.
"이걸 못 탈 거라 생각한단 말이에요!?" 미샤가 펄쩍 뛴다.
"못 탄다기보다는 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
"좋아요! 내가 한번 보여주죠!"
그러니까 뭘. 그의 연인은 익스트림 놀이기구를 타지 않아도 완벽한데. 척척 걸어가는 여자의 등을 보며 로건은 조금 웃는다.

42번째 로그

미샤 데이는 오늘도 로건 버트런드의 앞에서 좀 깎인 자존심을 억지로 외면하며 로건의 손을 붙들었다. 그는 붙들리고서도 놀라지 않은 듯 무던한 표정이다. 저 무심하고 돌 같은 남자가 대체 뭐가 좋다고 나도 이러는지! 미샤는 속으로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일갈하고 나서 그의 손을 잡은 팔을 당겼다. 로건은 힘으로 버티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을 텐데도 쉽게 이끌려와준다. 그러면 그 순간에 미샤는 다시 한 번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말한다.

"도와줘요. 춤 연습이요."

그리고 로건 버트런드는 미샤 로즈마리 데이의 부탁을 거부하는 남자가 아니다. 절대로.

41번째 로그

로건은 눈을 껌뻑인다. 미샤는 이제야 좀 가라앉은 얼굴을 한다. 그가 손을 뻗자 미샤가 당연하단 듯이 로건의 팔을 끌어와 소파 옆으로 이끌었다. 로건은 미샤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무슨 노래인지 아직 못 들었습니다.” 미샤가 그의 손을 꽉 쥐며 눈을 흘긴다. “나 노래 못하는 거 알면서 그걸 듣고 있었어요? 진짜아.” 그러면 로건 버트런드는 째려보는 미샤의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치고서 말하는 것이다.
“저는 좋았습니다.”

그리고 미샤는 이따금 훅 들어오는 이런 말들에 머리를 싸매고 싶어진다. 이 융통성 없고 센스도 없고 내 맘도 잘 모르면서 사람 심장은 무지하게 떨리게 하는 남자라니. “……미샤?” 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드물게 맞는 음정으로 미샤가 부른다.

“Say yes to heaven천국을 받아들여요.”

로건이 그 곡조 따라하듯 서툴게 부른다.

“Say yes to heaven천국을 받아들여요.”
“Say yes to me날 허락해요.”

미샤가 다음 가사를 부르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Say yes to……” 로건은 그 가사를 따라 읊느라 입술을 뗀다, 그 순간에 미샤가 눈을 꾹 감고 로건의 뺨을 손으로 감싸 당겼다, 나를 허락해요. 노래는 완결되지 않는다. 키스.

40번째 로그

음정 박자 하나도 맞지 않는데 미샤는 웃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여자의 옆얼굴의 뺨에 장밋빛 홍조가 돌고 나름대로 박자를 맞춘다고 맞춘 건지, 한 박자를 쉬고서 애매한 타이밍에 미샤는 가사 한 줄을 더 읊었다. “I've got my eye on you난 항상 당신을 지켜보고 있어요.” 대낮의 햇빛이 하얗게 미샤의 꽃잎 모은 것 같은 색깔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고, “Say yes to heaven천국을 허락해요.” 노래라고 하기 어려운 읊조림과 엉망인 흥얼거림에도 로건은 홀린 듯 그 자리에 서서 그것을 들었다. 어쩌면 영원히 그 어린애같이 서툰 음색을 한 노래를 들을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으로.

39번째 로그

순진한 포옹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그는 역시 자신이 밤을 지새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당신의 뒷면까지 사랑하고 있음을 미샤가 인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당신의 곁을 내도록 공전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을 뿐.
모든 천체가 자신의 바람으로 빛을 내는 밤이다. 그러고 나면 아침이 올 것이다.

38번째 로그

飛龍玄花

천하 위에 군림하는 용의 구천九天은 살육의 역사요, 강요된 열망의 산물이다. 피를 나눈 형제들의 시신을 짓밟고, 인정과 도리를 저버리며 거머쥔 피의 옥좌. 광포한 권세를 두른 그의 자취마다 부패한 시취가 풍긴다. 결핍된 애정과 불우한 유년이 키워낸 무정한 금수. 사사현使斯玄. 그러나, 창공을 누비는 용의 유약은 오로지 한 인간만이 목도할 수 있다. 천한 핏줄과 척박한 땅에서 자라 살갗처럼 두른 상흔. 멸시와 하대를 씹어 삼키며 학습한 무연無緣의 미덕. 부조리한 세간의 풍파를 견뎌내어 이룩한 개화. 그 불경한 검은 꽃은 용의 권위 아래 감히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사랑을 구걸하지 않으매 고립을 자처한다. 비루한 생애를 영위하기에 가질 수 있는 맹랑하고 무엄한 면모. 그러나 도처에 난무하는 기만과 아첨 속에서 날 것의 진심은 가장 귀한 덕목이 되지 않던가. 지엄한 옥좌에서 내려와 비연飛聯의 고립무원 속에 친히 머무르는 이유. 타의 생을 무참히 도륙하던 그가 단 하나의 생에 근심하게 되는 것. 속절없이 범람하는 생경한 감각. 마침내, 열애熱愛.

37번째 로그

天上을 받드는 天下

부패한 음식물의 악취와 아편의 매캐한 연기가 낭자한 거리. 한 뼘짜리 창문과 사육되는 동물 우리처럼 비좁은 방 안. 파리가 날리는 정육점엔 온갖 고기들의 살점이 잘려 나가고, 썩어가는 나병 환자들이 길목마다 몸을 뉘인 빈곤과 질병의 근원지. 용이 몸을 웅크린 그 불경한 성채엔 장차 창공 위로 비상할 天下의 역린이 자란다. 검은 머리. 검은 눈. 기어코 잇닿은 인연. 반쪽짜리 핏줄 따위로 형용하기엔 한없이 짙고 아득한 혈연. 무책임한 불우를 공유하였음에도, 배우지 못한 날 것의 애정마저 받아 마시는 어린 내 동생. 비연飛連. 어슴푸레한 새벽, 살갑지 않은 새파란 한기를 꿰뚫고 마주한 시선 아래 묵연은 맹세한 것이 있다. 가장 낮고 더러운 곳에서, 가장 높고 자유로운 곳까지 널 받들어 올리겠다고. 도처에 도사리는 불결을 온몸으로 막아서고, 가장 어두운 밤의 곁을 함께하며 너만은 외롭지 않은 삶을 만들어주겠다고……. 온 생애를 바쳐 천상天上 을 받드는 천하天下. 배반이 팽배하는 진창 위를 함께 살아가는 단 하나의 가족.

36번째 로그

비연은 누덕누덕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밤늦은 시각. 제 오라비가 일하러 떠난 홀로 남은 탓이었다. 늘 어두웠지만, 오늘따라 밤이 두꺼웠다. 바깥에서는 사내 몇몇이 드잡이질을 하는지 고성과, 물건 가지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연의 동그란 두 눈 가득히 눈물방울이 고였다. 괜찮아. 괜찮아.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는 낡은 봉제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였다. 아이의 오빠는 이게 두려움을 물리쳐 주는 주문이라고 했다. 처음 이 주문을 배울 때까지만 해도 비연은 모든 게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아무리 되뇌어도 안심되지 않았다. 비연은 지난한 외로움과 가늠할 수 없는 불안감에 작게 흐느꼈다. 포동포동한 젖살을 따라 눈물 자국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