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번째 로그

후원에 봄바람이 불었다. 동백과 함께 핀 꽃들이 바람에 얕게 흔들리고 그에 따라 여린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볕뉘도 점점이 산란한다. 조각조각 눈부시게 흩어지는 햇빛 때문에 사현은 언젠가처럼 불가항력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눈꺼풀 내려감는 것이 두렵거나 안타깝지 않았다. 손끝에 햇빛이 닿고, 시린 겨울 끝 흰 빛이 미온을 띠는 것을 느끼며 그는 고뿔에 앓던 어떤 밤 제 이마 위로 내려앉던 작은 손을 떠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34번째 로그

사현이 그 말의 저의가 무엇인지 짚는 사이 비연은 이불을 그의 목께까지 끌어올리고 잠에 들라 나긋이 종용하듯 이마를 느리게 토닥이기 시작했다. 희한하게 그 박에 맞추어 사사현은 정말로 다시 졸려진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잠기운 사이로 닿았다 천천히 떨어지는 비연의 손바닥이 제 이마처럼 미온으로 덥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몽중에서 깨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므로 제 몸이 식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현은 눈꺼풀을 아쉽게 내렸다. 서운하게 미련이 남는 까닭은 다만 눈을 감으면 그 작고 흰 낯을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33번째 로그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하나 꿈이니 죽어도 괜찮지 않겠느니.”

“꿈이라 여기십니까.” 비연은 그제야 그가―본래도 제 앞에서는 그러했으나―유독 체통도 허물도 없이 순진하게 구는 이유를 깨달았다. 사현이 손을 떨어뜨린다.

“모르겠다. 몽중에 무얼 묻느냐. 그러나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면 나는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
“……안 됐습니다.”

32번째 로그

“……연아.”

쥐어짜낸 호명은 아니었다. 그의 음성은 차라리 나직한 바람 같았다. 비연은 침전 문 앞의 음영에 잠겨 그를 돌아본다. 눈길이 마주쳤을 때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침상 옆으로 와 앉는다. 사현은 참지 못하고 아이처럼 웃고 말았다. 비연은 느리게 손을 모으고 재차 옆에 둔 손수건을 적셨다.

“뭐가 좋다고 그리 웃으십니까.”
“네가 나를 봐주지 않았느냐.”

어린아이가 날아가는 새를 보았다며 자랑하듯이. 무구한 낯을 보며 비연은 한숨도 채 쉬지 못하고 억누른다. 궁금증은 풀리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탓이다. 당신은 왜 이다지도 나를 귀히 여기는가. 목을 매는가. 사현이 한 번 더 웃는다. “돌아보지 않았느냐, 이렇게.”

31번째 로그

꿈이군! 멋진 꿈이야. 사현은 드러누운 채로 시원한 손길을 받으며 확신했다. 몽롱한 머리가 아예 꿈이라고 단정 짓고 나니 차라리 편안하고 기분 좋아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조금 웃고 있으니 침상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비연의 검은 눈동자도 가늘어졌다. 왜 웃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게 또 웃겨서 사현은 조금 더 크게 웃었다.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고, 사사현은 느리게 몽중의―아마도―비연의 손에 들린 것이 물에 적신 손수건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직접 수를 놓아 가장자리에 꽃을 새긴 손수건이다. 꿈이 이다지도 구체적이고 선명하 다니 신기하지. 사현은 생각했다.

30번째 로그

입맛이 없어 자주 그랬듯 저녁을 먹다 도로 상을 물리고 비연은 그날, 밤이 늦도록 궁 안을 서성이며 생각, 생각을 했다. 어떤 가정을 하다가 지우기를 반복한다. 대개는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종류였다. 고작 고뿔에 그가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상상, 모두를 물린 황제의 침전에 감히 자객이 들이닥치는 상상, 혹은 그가 고뿔을 핑계로 한 광증에 걸려 또 다시 궐 안에 피바람 닥치게 하는 상상 같은 것들. 그러다 해시亥時가 끝나고 자시子時가 시작됨을 알리는 종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비연은 무엇에 홀린 듯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껴입었다. 이리 답지 않게 신경을 써서야 될 것도 안 되겠다는 마음이 반, 순수하게 그가 정녕 홀로 있는지, 후원에 진실로 그리 오래 있다 간 것인 지, 왜 그렇게 오래도록 자신에게 목을 맬 것처럼 구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반이다.

29번째 로그

“계속 폐하 이야길 할 셈이니.”
“하, 하지만 마마님… 그~… 폐하께서는 마마를 편애하시니까, 아야.”

비연이 잔을 대번에 내려놓고 가는 팔을 뻗어 아프지 않게 선화의 이마에 꿀밤을 놨다. 눈을 질끈 먼저 감고 아야, 소리를 낸 선화가 머쓱한 얼굴을 한다. 밉지 않아 흘겨본 비연이 괜히 소매 매무새나 가다듬는다.

“아야는 무슨 아야. 닿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꾸, 꿀밤 놓으셨잖아요오…….”
“되었고, 차나 마지막으로 따르고 쉬러 가려무나.”
“네에…….”

해맑게 이야기하던 아이가 좀 시무룩해진 것이야 안쓰럽긴 했으나 다 혀 놀린 제 몫이라 생각하며 비연은 선화가 내어주는 잔을 받는다. 마침 데운 다기도 식고 찻물도 바닥을 보였다.

28번째 로그

눈발이 조금씩 내릴 때에는 아, 눈이 내리면 그대 얼굴 눈처럼 흰 데다 머리칼과 눈동자는 흑단처럼 곱고 까만 터라 설중의 풍경이 그대와 몹시 어울리겠다는 생각도 했더랬다. 후원에는 사시사철 그가 꽃을 볼 수 있도록 계절에 맞는 꽃을 죄 심어놓았으므로 한겨울에도 희고 빨갛게 핀 동백이 눈에 띄었다. 날리는 눈발 맞는 꽃송이가 그럼에도 꿋꿋하게 제 아름다운 용모 자랑한다. 이 또한 어쩌면 비연답지 않은가. 사현은 생각한다.

27번째 로그

언제부터 그리들 충신이었다고. 사사현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으나 그들에게 말을 전하려 옥좌에서 일어났을 적에 자신 걸음이 휘청거렸을 때는 다른 변便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래서야 대신들에게 들어가서 쉬시라는 말을 재촉한 꼴이 됐다. “폐하!” 태사太師가 당장이라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 말할 듯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 사현은 몹시 짜증스러운 태도로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