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번째 로그

이불보 바깥으로 튀어나온 손, 이를 잡아챈 비연은 마치 밍밍한 미음을 삼킨 것같이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손 크기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차이가 나는데, 어째 그 위로 얼기설기 그어진 흉터 따위는 두 손바닥이 겹쳐져 있노라면 이렇게나 다를 게 없어 보인다고. 그리 고하는 사현의 나직한 음성에 깃든 감정은 기어코 연모와 결이 비스름했을 터였다. 언젠가의 순간을 상기하며 비연은 한참은 크고 기다란 손을 붙들어 포개어본다. 열기로 잔뜩 뒤덮여 뜨끈하다 못해 아궁이 불에 덴 홧홧한 체온. 이미 케케묵은 상처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제가 금방이라도 칼에 베인 듯한 반응으로, 어쩌지 못하여 다만 손이라도 붙잡고자 감싸 쥐던 그때의 사현은 가슴 속에 새로운 흉이 진 것 마냥 미약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채 제 앞에 서 있었다. 하여 그 모습이 꽤 괘씸하다고, 비연은 더러 생각했던 것도 같아서.

25번째 로그

햇빛이 무참하리만치 화사하게 쏟아져 발치에 부서졌다. 찬란한 것이 우리의 코앞에서 산산조각 나는 것은 어쩌면 불공정하고 무정한 신이 내린 순리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고 싶었다. 가능하면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묵연은 의미도 없이 “괜찮아,” 하며 작은 몸을 안는다. 오래 끌어안는다.

24번째 로그

사사현은 단숨에 잔에 남은 술을 들이켰다. 그러므로 비연은 더 이상 들어 있지도 않은 것이 출렁이는 것 같다는 착오를 겪는다. 아니, 출렁이는 것은 담겨 있지도 않은 술인가, 아니면 자시가 넘은 이 밤의 짙푸른 공기인가, 그도 아니면 이미 무례를 몇 차례나 저질렀음에 자신을 죽여 마땅한 자격을 쥐고 있는 이 남자의 앞에 선 자신의……, 고비연이 숨을 삼킨다. 사현의 손이 제게로 뻗쳐왔기 때문이다. 영원은 없다, 연아. 손길은 다정하고 조심스럽게 뺨을 더듬는다. 제 것보다 배는 굵고 긴 엄지손가락이 정갈하게 눈가를 짚는다. 비연은 아연한 마음을 쏟아버리지 않도록 꽉 끌어안고서 사현의 눈길을 똑바로 받아냈다.

23번째 로그

사현은 느리게 눈길을 비연의 낯으로 가져간다. 술 한 모금을 넘긴 후였다.

“무어가 그대 성에 다시금 차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
“일전에 후원은 꽃으로 채워준 바 있고, 진미는 그대가 마다하고. 아. 각지 에서 내로라하는 장인들을 불러와 빚은 자기나 장신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겠어. ……어느 것이 마음에 차지 않았나. 상아 빗? 옥비녀? 그도 아니면,”
“죽어버리라고.”

여유마저 느껴지는 사현의 말을 감히 끊고서 비연이 짓씹는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눈동자에 빛 아닌 다른 강렬한 것이 일렁이는 착각이 있다. 그가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시선이 여지없이 부닥쳤다.

“죽어버리라고, 했잖아.”
“그대.”
“소첩의 마음에 차는 건 그것뿐일 겁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영원은 없다, 연아.”

22번째 로그

아무 말도 않자 비연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한 자 한 자 짓이기듯 발음한다.

“달리 소첩의 말에 하실 말씀이 없으시옵니까.”
“…….”
“아니면 이 술을 마시고 그대로 이행하실 작정이신지요.”

비웃는 듯한 혹은 도발하는 듯한 비연의 말에도 사사현의 표정은 한 치 흔들림 없다. 술잔이 가득 차자 비연이 술을 따르는 것을 멈췄다. 깊은 암야. 그믐은 달이 보이지도 않아 별빛만 한참 찬란하다. 천하를 호령하고 일가를 몰살시키는 피비린내 떨치는 잔혹하고 강대한 제왕. 사사현은 귀애하는 비에게 저주나 다름없는 말을 듣고도 평온했고, 고비연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믐처럼 새까만 눈동자에 홀로 괴괴하게 빛나고 있는 백색 두른 사내.

21번째 로그

“폐하께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나이다.”

밤을 조금이나마 켜놓은 촛불이 평온하게 흔들렸다. 고비연은 술잔에 청주를 따르며 그런 말을 했다. 아주 담담한 조였다. 사현은 비연이 자신에게 승하, 도 아니고, 시해, 도 아니고, 몹시 솔직하게 ‘죽어버렸으면’이라는 단어를 고른 것에 있어 그것부터가 비연답다는 생각을 했다. 비연이 기울이고 있는 청주 병 주둥이에서 술이 내처럼 흘렀다. 작은 소리를 듣고자 하면 시냇가 곁에 앉은 듯한 착각이 듦을 느끼면서 사현은 느리게 채워지는 술잔을 보고만 있었다.

20번째 로그

데비가 물었다.

“오빠는 나빠?”

타나토스 블랙은 데비 블랙이 죽어야 할 이유를 단 하나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어떻게든 동생이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다. 만약 시간이 기적처럼 돌아가도 자신은 싸구려 봉제 인형을 구하러 갈 것이고 그 착한 아이는 오빠가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집 앞에 나와 겁도 없이 밤 그늘을 기웃거릴 테니까.

오빠는 나빠? 동생의 모습을 꼭 닮은 이 포식자는 말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오빠’라는 말이 나쁜 뜻이냐는 뜻으로 물었을 테지만, 타나토스는 찰나 아이에게 너마저 나를 책망하는 것이냐고 손을 뻗을 뻔 했다, 어쩌면 무릎 꿇고 아주 무너질 뻔 했다.

“그래, 나빠.”

대신 나온 말은 그것 하나였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린다. 데비가 얼굴을 기울였다. “왜?” 그러면 타나토스는 오래도록 침묵한다. 시계가 없어 초침도 움직이지 않는 적막 속에서 달빛만이 아이의 머리 위를 가로지른다. 침묵은 늘 타나토스 블랙의 곁에 있는 것이었건만 이번만은 견딜 재간이 없어 그는 곧 몸을 돌려 겉옷을 다시 챙겨 들었다. “……곧 간다.”

아이는 고개를 올려 그를 보다가 다소 시무룩해진다. 타나토스는 데비의 수그린 정수리를 모른 척 했다. 데비는 이제 오빠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다행이면서도 몹시 아쉬웠다.

19번째 로그

“오빠.”

아이가 그 말을 했을 때 일순 타나토스는 새카만 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되었다. 그림자조차 없는 무저갱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탄환이 귀를 뚫고 들어가면 이런 기분일까에 대해 그는 실없이 상상하다 비틀거린 걸음을 바로 잡는다. 다시 고개를 들면 데비가 멍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데비. 타나토스는 몇 걸음 아이에게 다가간다. 위해를 가하고자 할 의도 하나 없다. 달빛이 청명하게 아이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한쪽에 촛불을 켜놓아 아이의 윤곽은 또렷이 보인다. 목탄을 쥔 손을 향해 뻗으면 A, B, C, D, 검은 궤적이 서툴게 종이 위로 커다란 알파벳을 그려놓았고 자연히 그 위로도 빛이 든다. 아이의 손바닥은 검댕이 묻어 시커멓기 짝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타나토스는 망설임 없이 데비의 말아 쥔 손가락을 펴 손바닥에 제 손끝을 대었다.

18번째 로그

네 이름은 데비야.

뱀파이어 아이를 데려와 그렇게 칭한 뒤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안젤라는 타나토스의 묵언에 익숙하고 타나토스는 말없이 비밀을 숨기는 데에 또 익숙해지는 시간. 데비 블랙이 된 까만 머리 까만 눈동자의 뱀파이어 아이는 가끔 글자를 익히고 아직 말을 다 떼지 못한 어린애처럼 옹알거리다가 발음을 따라 하고, 타나토스 블랙은 제 삶에 난 작고 어린 하나의 구멍을 보면서 기일을 잊은 자신에 대해 지워내려 애썼다. 조악한 왕관을 쓰고 웃고 있는 공주 인형도 눈 위에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진 광경을 따라가면 나오는 참혹한 아이의 시체 같은 것도 전부 다……. 마법 같은 한 문장에 죄 수그러든다. 네 이름은 데비야. 데비 블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