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째 로그

둘에게 죽음은 흔했고 그만큼 가치 없는 것이었다.

7번째 로그

언덕 위로 올라가도 역시 별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스산하게 바람이 불기 시작하기에 데비는 조금 실망한 듯했다. 레토는 거봐, 안 보이지, 따위의 말을 하지는 않고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데비를 안아들었다. 그는 저항 없이 아주 익숙하게 레토의 목에 팔을 감는다. “돌아가자.” 하는 말에도 대답은 않았지만 순순했다.

6번째 로그

문득 레토는 데비의 작은 손을 다시 고쳐 맞잡으며 별빛에 대해 생각했다. 과학자들은 저 빛이 이미 몇 백만 년 전에 사라진 것이 이제야 지구의 하늘로 닿는 것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그 빛은 아무리 쏟아진들 햇빛에는 불타 사라질 뱀파이어인 데비를 죽일 수 없는 것일까. 레토 블랜차드는 단 한 번 눈부신 것을 사랑해본 일 없다. 그의 눈에 든 것들은 차라리 어둡고 탐미적이고 고혹적인 것들이었지 희망처럼 빛나는 것은 그의 시야에 둔 적 없었으므로. 그러나 그는 데비가 이토록 좋아한다면 자신도 지켜볼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데비 블랙이 좋아하는, 데비 블랙을 죽이지 않는 빛.

5번째 로그

바깥은 저녁이었다. 어둠이 익숙한 둘에게는 날이 흐리다는 것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계절이 어느덧 흘러 초봄이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레토는 곧 봄비가 내릴 것이라 직감하면서도 더 이상의 별 말 없이 데비를 따라 나섰다. 대신 우산 하나는 조용히 챙긴 채였다.

4번째 로그

데비는 문득 그에게 대체 왜 신부 행세를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널 만나기 위해서지, 라는 대답이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3번째 로그

악마에겐 남는 게 시간이라 이따위 기록쯤은 얼마든지 남길 수 있다. 소문 처럼 입에서 입으로 와전시킬 수도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문자로 낙서를 할수도 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수백 년이 지났지만 데비의 곁을 고집하는 것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으므로, 나는 인간의 시간을 계속 표류하는 중이다.

2번째 로그

아아, 제 소원은 고작 이 저택에서 평화롭고 가늘고 길게 고용되어 일이나 하는 것이었는데. 어쩌면 여기에서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일기를 누가 믿어주기나 할까요? 만약 누군가 이 기록을 보게 된다면 부디 제가 쓰는 이 마지막 문단만은 찢기거나 닳지 않아 꼭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상태이길 바랍니다.
이건 간곡한 전언입니다!

소문의 뿌리를 따라가지 마세요. 생겨난 말은 절대로 이유 없이 떠다니지 않아요. 자칫하면 당신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모르는 채로 덮어두는 것이 더 나은 진실도 있어요.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사람이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상자를 열어버린 한 여자의 후손이라고는 하지만요…….

오, 그림자를 보아버린 저는 이제 매일같이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1번째 로그

그러나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데 비해 추문이 난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둘은 말이 없었다. 말인즉슨, 문자 그대로 오가는 대화가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함께 있을 때에 목소리 한 번 내는 적 없으니 으레 연인들 사이에 편안하게 느껴지는 침묵인가 싶다가도 분위기를 살펴보면 그 공기의 결이 묵음으로 단절되었다 싶을 정도로 적막이 지나쳤다. 테레즈는 레토를 돌아보지 않고 레토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래서 아가사는 생각했다, 어쩌면 두분이 그냥 자주 붙어 다니는 게 보여서 입 가벼운 풋맨 중 하나가 퍼뜨린 거짓소문일지도 몰라. 그도 그럴 게 두 분은 너무…… 아가사는 너무, 다음에올 표현을 고르고 또 골랐다. 두 분은 너무…… 테레즈 발렌타인과 레토.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한 듯 굴면서 당연하지 않은 침묵을 그 사이에 놓아두고 있는 사람들. 아가사는 고민하던 문장을 이렇게 끝마친다. 두 분은 너무 ‘서로에게 더 바라는 것이 없어 보여.’